[바코 인사이드] 프로농구 최고 득점원으로 자리매김한 ‘빅리거’ 안드레 에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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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꽁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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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10월에 작성했으며,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4년 11월호에 게재됐습니다.
KBL이 2015~2016시즌부터 단신 외국 선수를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에밋은 KBL과 인연을 맺었다. NBA와 중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뛴 에밋은 탁월한 득점력으로 단연 이목을 끌었다. 이는 국내 무대에서도 마찬가지. 지나칠 정도로 본인의 득점에 집중했으나, 실력만큼은 대단했다. 에밋의 소속 팀이었던 전주 KCC(현 부산 KCC)도 챔피언 결정전에 나설 수 있었다.
대학 생활
에밋은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나고 자랐다. 카터고등학교를 다닌 에밋은 지역에서 실력을 갖춘 이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텍사스공과대학교에 진학했다. NCAA 텍사스텍 레드라이더스에서 네 시즌을 모두 보낸 에밋은 명장으로 알려진 밥 나이트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고교 시절부터 유능한 득점원으로 손꼽혔던 그는 텍사스텍 소속으로 두 번째로 가장 많은 누적 득점을 기록했으며, 빅12컨퍼런스에서 역대 네 번째로 많은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공격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참고로, BIG-12 컨퍼런스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린 이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버디 힐드다).
에밋은 대학교 첫 시즌 주전으로 나섰다. 평균 7.7점 3.6리바운드를 책임졌다. 그리고 2001년 여름에 부임한 나이트 감독이 누구보다 에밋의 득점력을 높이 샀다. 에밋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고, 에밋은 일약 팀의 주포로 성장했다.
2학년이었던 에밋은 경기당 18.7점으로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컨퍼런스 평균 득점 3위에 올랐고, 올-빅12 퍼스트팀에 호명됐다. 졸업할 때까지 3년 연속으로 해당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4학년 때는 올-아메리칸에도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텍사스주에서는 최고 실력자로 평가 받았다.
쉽지 않았던 NBA 도전
대학을 마친 에밋은 프로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숱한 유망주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NBA로 향했기에, 대졸자였던 에밋의 가치는 낮을 수밖에 없었다. 3년 연속 대학에서 내로라하는 득점원이었음에도, 에밋은 1라운드에서 호명 받지 못했다.
그러나 2라운드에서 지목을 받았다. 시애틀 슈퍼소닉스(현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스)가 에밋을 불러들인 것. 하지만 시애틀은 멤피스로부터 2005 NBA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추후 마이클 젤라블 지명)을 받는 대신, 에밋의 권리를 멤피스에 넘겼다. 그래서 에밋은 멤피스와 신인 계약을 체결했다.
에밋의 첫 무대는 서머리그였다. NBA로 진입했으나,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05년 1월 중순에야 처음으로 코트를 밟았다. 그리고 2004~2005시즌 8경기에 나서 7점을 기록한데 그쳤다.
에밋은 멤피스 소속으로 서머리그에 또 한 번 나섰다.
그러나 2005~2006중에 마이애미 히트로 트레이드됐다. 그때 마이애미는 멤피스로부터 제임스 포지와 제이슨 윌리엄스를, 보스턴 셀틱스로부터 앤트완 워커를 받아들였다. 우승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반면, 멤피스는 한계를 확인한 에밋을 내보냈다. 전력 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에밋은 트레이드 이후 마이애미에서 기회를 엿보고자 했다. 그러나 우승 도전에 나서는 마이애미였고, 에밋의 자리는 없었다. 결국 방출됐고, NBA D-리그(현 NBA G-리그)에서 남은 시간을 보냈다.
2006년 여름에는 댈러스 매버릭스 소속으로 서머리그에서 나섰다. 하지만 살아남지 못했다. 이후 그는 리투아니아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2007년 여름에 휴스턴 로케츠 소속으로 나섰다. 하지만 생존하지 못했고, 벨기에리그로 향했다. 벨기에리그에서 평균 23.9점을 책임지며 득점 1위를 기록함과 동시에, 팀을 우승으로 견인했다. 그 후에도 NBA를 노크했지만, NBA에 입성하지 못했다.
NBA에 들어가지 못한 에밋은 프랑스와 베네수엘라에서 뛰었다. 2009~2010시즌에는 중국프로농구리그(CBA) 산동 라이온스에서 뛰었다. 한 경기에서 무려 71점을 퍼붓는 등 폭발력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2010~2011시즌을 푸젠에서 보냈고, 이후 D-리그에서 남은 시즌을 마쳤다.
그리고 에밋은 2011~2012시즌에 뉴저지 네츠(현 브루클린 네츠)에서 뛸 기회를 얻었다. 뉴저지가 시즌 막판에 에밋과 계약하면서, 에밋이 NBA에서 다시 뛸 수 있게 된 것. 그러나 에밋은 시즌 중후반에 합류해 많은 경기를 뛸 수 없었다. 6경기에서 평균 7.5분을 뛰었고, 경기당 2.2점(필드골 성공률 : 57.1%, 3점슛 성공률 : 00.0%, 자유투 성공률 62.5%) 1리바운드에 그쳤다.
NBA로 돌아온 에밋은 서머리그에 다시 나섰다. 2012년 10월 초에 시카고 불스와 계약했으나, 개막 직전에 방출을 당했다. 그 후 레바논과 베네수엘라, 멕시코 등 여러 리그를 거쳤다. 필리핀에서도 잠시 뛰었다.
전주에서
에밋은 2015년 여름 한국에서 뛰고자 했다. 또, 당시 KBL 환경도 에밋에게 좋았다. KBL이 그때 외국 선수 두 명을 장신 선수와 단신 선수로 구분했고, 두 외국 선수를 제한적인 시간 동안 동시에 뛸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에밋은 2015년에 열린 KBL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5순위로 KCC의 부름을 받았다. 대부분의 구단이 1라운드에서 빅맨을 호명한 것과 달리, 추승균 감독은 에밋을 먼저 불러들였다.
에밋의 득점력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밋은 2015~2016시즌 전부터 득점력을 과시했다. 안양 KGC인삼공사(현 안양 정관장)와의 프로-아마 최강전에서 29분만 뛰었음에도 35점을 퍼부은 것. 여기에 13리바운드와 4어시스트를 덧붙이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에밋은 정규리그에서도 득점력을 뽐냈다. 다만, KCC가 2라운드에서 포워드형 외국 선수인 리카르도 포웰을 불러들였고, 에밋과 포웰의 공격 반경이 겹쳤다. 두 선수가 함께 나설 때, KCC의 공격력이 강하지 않았던 이유.
게다가 에밋이 공을 잡을 때, 자신의 공격을 무조건적으로 살폈다. 포웰과 전태풍을 비롯한 볼을 만져야 하는 선수들이 볼을 많이 만지지 못했다. KCC는 결국 2015~2016시즌 중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와의 트레이드를 실시했다. 포웰을 전자랜드로 보냈고, 전자랜드에 있던 허버트 힐을 데리고 왔다.
골밑 공격에 능한 힐이 가세하면서, 에밋의 공격력은 더욱 살아났다. 30점 안팎의 득점으로 팀의 공격을 확실하게 주도했다. KBL 입성 첫 시즌부터 경기당 25.7점 6.7리바운드 2.8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에밋을 등에 업은 KCC는 정규리그 1위로 2015~2016시즌을 마쳤다. 에밋의 득점력은 플레이오프에서도 대단했다. 정규리그 때 KGC인삼공사한테 강했던 에밋은 4강 플레이오프에서도 무려 평균 33.8점을 책임졌다. KCC를 챔피언 결정전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에밋은 챔피언 결정전에서 KCC의 해법으로 거듭나지 못했다. 고양 오리온(현 고양 소노)을 상대로 힘을 쓰지 못한 것. 오리온의 촘촘한 수비에 힘을 쓰지 못했고, KCC 또한 2승 4패로 통합 우승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KCC는 에밋과 함께 하길 원했다. 그러나 에밋은 2016~2017시즌에 부상으로 많은 시간을 뛰지 못했다. 또, 에밋의 파트너였던 리오 라이온스가 포워드 유형의 선수라, 외국 선수 간의 조합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전 시즌의 흐름을 반복한 KCC였다.
KCC는 결국 라이온스를 내보냈다. 대신, 언더사이즈 빅맨인 에릭 와이즈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에밋이 부상에서 돌아왔다. 에밋의 득점력은 여전했으나, 에밋의 전반적인 효율이 이전과 다소 달랐다. 야투 성공률이 50% 이하였고, 득점하지 못해도 자기 공격 위주로 플레이했다. KCC는 해당 시즌 최하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CC는 에밋과 또 한 번 동행하기로 했다. 동시에, FA(자유계약) 최대어 중 하나였던 이정현(현 서울 삼성)을 붙잡았다. 최고 득점원이자 외국 선수를 살려주는 이정현이 가세해, KCC도 공격의 다변화를 꾀할 수 있었다.
에밋은 변함없이 팀의 공격을 주도했다. 이정현과 역할 분배 또한 나름대로 잘했다. KCC는 3위로 2017~2018 정규리그를 마쳤다. 2016~2017시즌과 다른 경기력을 보여줬다.
KCC는 플레이오프 첫 관문에서 인천 전자랜드를 상대로 5차전까지 치렀다. 4강 플레이오프로 힘겹게 올라섰지만, 서울 SK와의 시리즈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애런 헤인즈와 장신 포워드진을 앞세운 SK에 1승 3패로 밀렸다.
KCC의 플레이오프는 끝이 났다. 에밋도 KBL에서 생활하기 어려웠다. KBL이 외국 선수 계약 방식을 자유계약으로 바꿨고, 단신 외국 선수의 신장을 종전 193cm 이하에서 186cm 이하로 줄였기 때문. KCC와 에밋은 결국 재계약하지 않았다. 에밋의 한국 생활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한국을 떠난 후
전주에서 세 시즌을 보낸 에밋은 2019년에야 푸에르토리코에서 잠시 뛰었을 뿐, 선수 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2019년 9월 24일. 에밋은 자신의 고향인 댈러스에서 총격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3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