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딸도 아닌데 자꾸 얘기하게 돼 [비장의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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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딸도 아닌데 자꾸 얘기하게 돼 [비장의 무비]
밤길 홀로 걸어 집에 오는 엄마(오민애)의 양손엔 짐이 한가득이다. 나눠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쟁여 놓기 위해서 잔뜩 장 보는 일에 이젠 익숙해졌다. 불 꺼진 집에 들어와 대충 치워놓고 혼자 TV 앞에 앉는다. 그러다 마룻바닥에 모로 누워 잠든 엄마를 지나쳐 딸(임세미)이 살금살금 자기 방에 들어간다. 독립해 따로 살던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기척에 눈을 뜬 엄마는 모른 척 다시 눈을 감아 주었다.
당분간 집에 들어와 있겠다고 했다. 같이 사는 친구도 함께 와 있을 거라고 했다. 단출한 짐을 챙겨 와 딸을 기다리던 친구는 엄마의 마뜩잖은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저는 그린이 허락을 구했다기에 그런 줄 알고 온 거예요. 이런 상황이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엄마가 대꾸했다. “우리 아이 이름은 그린이 아니에요.”
내 딸을 ‘그린’이라고 부르는 친구(하윤경)를 딸은 ‘레인’이라고 불렀다. 둘은 한 침대를 썼고 손을 잡고 누웠다. 딸이 친구 품에, 아니 그린이 레인 품에 안겨 잠든 모습을 엄마도 문틈으로 보게 되었다. 짐작은 했지만 확인하고 싶지 않던 일. 내 딸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 엄마가 결국 언성을 높인다.
“너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혼인신고 할 수 있니? 자식은? 가족이 될 수 있어?”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하게 막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엄마가 그랬잖아. 싫은 건 싫다고 하고 부당한 건 부당하다고 말하고 살라며? 엄마가 나 그렇게 가르쳐놓고 왜 이러는 건데?” 엄마의 대답은 한참 뒤에 나왔다. 한숨처럼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넌, 내 딸이니까.”
하려는 얘기가 이것뿐이라면 익숙한 가족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밋밋한 퀴어영화로 미끄러졌을 것이다. 다행히 이 영화엔 집 바깥의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와 무연고 치매 환자 사이에도 만만치 않은 사연의 실타래가 놓인다. 그 덕분에 제목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가 ‘딸’이 아님을 알아챘다. ‘대하여’였다. ‘딸’에 대하여 생각하는 엄마만이 아니라, 더 많은 것들에 ‘대하여’ 질문하고 싶어지는 나 또한 결국 이 이야기에 붙잡힐 운명이었다.
남과 다른 삶을 선택한 딸은 남과 다른 삶을 살게 될까 걱정하며 살아온 엄마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내 엄마의 딸’로 산 시간보다 ‘내 딸의 엄마’로 산 시간이 더 많아진 주인공은 앞으로 누구에게 기댈 수 있을까. 평생 가족을 돌보다가 이젠 가족이 아닌 사람까지 돌보는 엄마를 돌보는 일은 결국 누구의 몫이 될까.
집 안의 ‘개인적 사연’이 집 밖의 ‘사회적 사건’과 맞물려 매끄럽게 돌아가는 이야기의 줄기는 같은 제목의 원작 소설에서 가져왔다. 인물이 말로 뱉지 않은 속마음을 독자는 작가의 글로 다 알게 되지만, 영화의 관객은 배우가 표현하는 만큼만 눈치챌 수 있다. 그 숨겨진 마음 충분히 드러내는 배우들의 연기. 그렇게 해내고 말겠다는 감독의 마음이 곳곳에 드러나는 연출. 짝짝짝.
방 한 칸 내주는 것보다 마음 한 칸 내어주기가 더 쉽지 않은 세상에서, 이 영화가 보여준 각별한 연민과 연대에 대하여 계속 생각하고 있다. 비(레인)를 만나 초록(그린)이 더 짙어진 그 집의 특별한 계절에 대하여 줄곧 떠올리고 있다. 내가 딸도 아니면서, 〈딸에 대하여〉 자꾸 얘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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