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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환 전 감독, 7일 별세... 원조 '붉은 악마'와의 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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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환 전 감독, 7일 별세... 원조 '붉은 악마'와의 작별


멕시코 4강 신화의 주역, A대표팀 사령탑 5번 맡는 진기록도... 불우했던 말년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 신화의 주역인 원조 '붉은 악마' 박종환 전 국가대표 감독이 지난 10월 7일 별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축구팬들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향년 87세다. 대한축구협회는 9일 "박종환 감독 장례를 대한축구협회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오는 10일 오전 9시 축구회관에서 진행되는 영결식을 협회가 주관할 것이라고 전했다
 
박종환 전 감독은 1970-90년대 한국축구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며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이자 풍운아다. 현재 이북 지역인 북한 황해도 옹진군 태생인 박 전 감독은 9살이던 1945년 광복이 되면서 가족과 고향을 떠나 강원도 춘천에 정착했다. 가난한 환경속에서도 스포츠에 재능을 발견한 박 전 감독은 축구로 진로를 정하여 춘천고와 경희대, 대한석탄공사에서 수비수로 선수생활을 했다. 청소년 대표팀까지 뽑힌 적이 있었지만, 스타 플레이어와는 거리가 있었고, 30세의 나이에 은퇴한 이후 일찍 지도자의 길에 뛰어들었다.
 
박 전 감독은 단국공고-성남고-유신고-전남공고 등 여러 고교축구팀 감독을 역임했고, 1975년부터는 실업팀인 서울시청 사령탑에 올라 무려 14년간 재임하면서 지도자로 차근차근 명성을 쌓았다. 능력을 인정받은 박 전 감독은 1980년에는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팀의 사령탑까지 올랐다.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현 U-20월드컵)은 박종환 전 감독의 50년 지도자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순간이자, 한국축구 역사를 바꾼 기념비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축구는 세계무대에는 철저한 변방중의 변방에 불과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A대표팀 '히딩크호'가 4강 신화를 쓰기 19년 전, 2019년 U-20 월드컵 정정용호가 준우승과 골든볼(이강인) 배출 신화를 쓰기 무려 26년 전에, 철저한 무명이었던 박종환호가 거둔 4강은 남녀와 모든 연령대를 통틀어 FIFA(국제축구연맹) 주관 대회에서 한국축구가 거둔 최고이자 최초의 성적이었다.
 
박종환호는 스코틀랜드와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0-2로 패했지만 개최국 멕시코와 호주를 나란히 2-1로 격파하는 이변을 일으키며 8강에 진출했다. 토너먼트에서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마저 2-1로 이기면서 4강을 달성했다. 준결승에서는 브라질에 1대2로 패해 결승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마지막까지 선전했다.
 
당시 한국축구의 상징인 빨간 유니폼을 입고 공수에 걸쳐 모두 지칠 줄 모르는 투혼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는 한국 선수들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외신들은 마치 '붉은 악령(Red Furies)'같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현재까지 한국 축구의 별명이자 공식 응원단의 이름이기도 한 '붉은 악마(Red Devils)'의 시초가 됐다. 또한 박종환 전 감독이 정착시킨 강인한 근성과 체력을 내세운 역습 축구스타일은, 이후로도 한동한 한국축구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았다.
 
▲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4강으로 이끌었던 박종환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별세했다. 향년 85세. 대한축구협회는 8일 "박종환 원로가 7일 오후 별세했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 연합뉴스

 
멕시코 4강 신화의 성공비결
 
멕시코 4강 신화의 성공비결로 박 전 감독 특유의 혹독한 스파르타 훈련 방식이 꼽히면서 여러 가지 뒷이야기도 남겼다. 당시 대회 장소인 멕시코는 해발 2000m 고지대였다. 박 전 감독은 국내에서 선수들에게 감기용 마스크를 착용하게 하고 최대 30분까지 견딜수 있도록 심폐 지구력을 강화하는 훈련을 단행한 게 실전에서 체력적으로 큰 효과를 봤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와전되어 선수들에게 방독면을 씌우고 훈련시켰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이는 후일 박 전 감독 부인이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박 전 감독은 프로무대에서도 눈부신 성공신화를 썼다. 1989년 천안 일화(현 성남FC)의 사령탑으로 부임한 박 전 감독은 당시 신인 선수들 위주의 팀을 육성하여 1993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 최초로 쓰리핏(3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박 전 감독은 성남에서 안익수, 고정운, 신태용, 이상윤, 이영진 등 한국축구를 이끌어갈 수많은 선수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멕시코 4강신화와 성남에서의 업적으로 인하여 지금도 올드축구팬들 사이에서는 박종환 전 감독을 1세대 지도자 중 최고의 명장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높은 위상과 인기를 바탕으로 박 전 감독은 국가대표팀 전임감독제가 정착되기전인 1980-90년대까지 A대표팀 사령탑만 5번이나 맡는 진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박종환 전 감독은 A대표팀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박종환 전 감독이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1996년 아시안컵에서도 충격적인 부진을 보였다. 
 
당시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1승1무1패의 졸전 끝에 와일드카드로 힘겹게 8강에는 올랐지만 토너먼트에서 라이벌 이란에 2-6으로 대패하는 이른바 '식스투 참사'의 굴욕을 당했다. 당시의 이란전 패배는 뉴스에도 보도될만큼 큰 충격을 줬고, 박 전 감독의 지도방식에 반발한 대표선수들이 고의로 태업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될 정도였다. 이 사건으로 명성에 큰 타격을 받은 박 전 감독은 다시 국가대표팀과 인연이 없었고, 지도자로서도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박종환 전 감독의 고질적인 단점은 역시 권위적이고 독불장군에 가까운 사고방식이었다. 이른바 스파르타 훈련과 체벌-폭언 등으로 대표되는 강압적인 지도스타일은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박 전 감독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달라진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끝까지 변화를 거부하며 갈수록 시대에 뒤처진 구식축구인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선수나 언론, 구단와 소통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하려는 박종환식 리더십은 아직 권위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던 1990년대에도 이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지도방식과 더불어 박 전 감독의 이미지가 나빠진 또다른 원인은, 잦은 막말과 외국인 감독을 향한 텃세였다. 특히 2002 한일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을 비난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박종환 전 감독이었다. 하지만 정작 히딩크 감독이 아무도 이루지 못한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내면서 박 전 감독의 주장은 공신력을 잃게 됐다. 

몰락기로 접어든 2000년대 이후로 축구계 주류와 화제의 중심에서 밀려난 박 감독의 축구인생은 평탄하지 못했다. 박 전 감독은 중국 프로축구 우한 야치, 여자축구 숭민 원더스, 대구 FC의 창단 감독 등을 역임했다. 이 기간에도 지소연 등 여자축구 유망주들을 발굴했고, 신생구단이던 대구가 K리그에서 자리잡는 데 나름의 공헌을 했지만, 당시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박 전 감독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지도자로서의 업적과 능력마저 저평가 받게 만든 안타까운 사례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7년 간의 야인생활을 거쳐 친정팀 성남 FC의 사령탑으로 70대의 나이에 복귀했지만, 불과 반년도 안 되어 '선수폭행 논란'으로 불명예 사임한 사건이었다. 처음에 박 전 감독은 가벼운 꿀밤이었다며 폭행을 부인했으나 여러 증언으로 사실이 밝히지면서 결국 퇴출당했다. 

박 전 감독은 이후 2018년 K3리그 여주FC의 총감독을 약 1년간 역임한 것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축구계에서 은퇴했다. 안타깝게도 축구게를 은퇴한 후 박 전 감독의 말년은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한 레전드라는게 믿기지 않을 만큼 불우했다. 박 전 감독은 지난해 2월 한 방송의 다큐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모처럼 근황이 알려졌는데, 주변 사람에게 빌려준 돈을 제대로 받지못하고 전재산을 사기 당해 떠돌이 생활을 해야할만큼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충격을 주기도 했다. 박 전 감독은 최근 코로나 감염의 후유증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투병하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박종환 전 감독은 한국축구의 한 시대를 빛낸 인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대와 본인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스스로의 명성을 깎아먹은 축구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박종환 전 감독으로 시작된 '붉은 악마' 신화가 오늘날 한국축구의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다. K리그와 여자축구 인프라의 발전에 그가 기여한 공로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도 분명히 역사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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